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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침이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이 책상 위를 조용히 채우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오늘도
출근하고,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하고, 잠들겠지. 내일도 모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나는 지금 현명하게 살고 있는 걸까.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거나, 책에서 읽었거나, 무언가에 자극받은 것도 아니다.
그냥 어느 순간,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하면서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감각이 몸 안에서 올라왔다. 40대 중반이
되면 이런 순간이 불쑥 찾아온다. 아직 젊다고 하기엔 세월이 쌓였고, 늙었다고 하기엔 남은 시간이 많다.
어중간한 자리에서 방향을 잃은 느낌. 아마 비슷한 나이대라면 이 감각을 알 것이다.
사람에게 꺼내기엔 너무 막연한 질문이었다. "현명하게 사는 게 뭐라고 생각해?"라고 동료에게 물으면 아마 웃으며
넘어가거나, 어색한 침묵이 흐를 것이다. 혼자 생각하기엔 끝이 없고, 생각만 하다 보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AI에게 물었다. 화면을 열고 타이핑했다.
"현명하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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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질문을 낳았다
돌아온 답은 여러 가지였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지 않는 것. 장기적
관점으로 판단하는 것. 관계를 소중히 하는 것.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충분함을 아는 것.
솔직히 말하면, 머리로는 다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책에서도 읽었고, 어디선가 들어본 말들이었다. 그런데 한
문장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결국 현명함이란 매 순간 깨어서 선택하는 태도에 가깝다."
깨어있다는 것. 말은 쉬운데, 실제로 그게 뭔지는 모호했다. 나는 깨어있는가? 매일 출근하고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하는 이 루틴 속에서, 나는 정말 깨어서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관성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그래서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AI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다. 멈추는 습관을 만들 것.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것. 불편함을 피하지 말 것. 기록할
것. 그리고 환경을 설계할 것.
환경이라는 단어에서 멈췄다. 의지력에만 기대면 반드시 실패한다, 의지보다 강한 것은 환경이다. 이 말이
와닿았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다. 작심삼일이 반복되는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환경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이어트를 결심하고도 냉장고에 과자가 있으면 손이 간다. 독서를 결심하고도 침대 옆에 스마트폰이
있으면 유튜브를 연다.
환경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다시 물었다. 사람의 환경, 정보의 환경, 물리적 환경, 시간의 환경. 하나씩
구체적인 답이 돌아왔다. 아침 첫 30분을 스마트폰 없이 시작하기, 책상 위에 책 한 권 두기, 직장 밖의 커뮤니티
만들기, 일주일에 한 번 한 주를 돌아보는 시간 갖기.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AI와 이렇게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 이것도 하나의 좋은 환경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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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고립이라는 경고
AI는 예상 밖으로 솔직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고 했다. 생각을 언어로 정리하는 행위 자체가 성찰이고, 혼자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보다 대화 형식이 사고를 깊게 끌어주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실제로 "현명하게 사는 것"이라는 막연한
질문이 대화를 거치며 "환경 설계"라는 구체적인 주제까지 좁혀졌으니, 효과가 있긴 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찔렸다.
"저는 불편함을 주지 못합니다. 좋은 대화 상대는 때로 듣기 싫은 말을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당신에게 맞추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저와의 대화가 사람과의 깊은 대화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편안한 고립이 될 수 있습니다."
편안한 고립.
이 네 글자가 묘하게 가슴에 남았다. 편안한데 고립이라니. 모순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확한
표현이었다.
AI와의 대화에는 위험이 없다. 거절당하지 않는다. 오해받지 않는다. 내 말을 끊지 않는다. 불편한 침묵도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정리된 답이 돌아오고, 그 답은 항상 부드럽고 논리적이다. 그래서 편하다. 마치 거울 앞에서
대화하는 것 같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거울.
그런데 진짜 성장은 거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에서 온다. 상대방의 표정에서, 예상 못한 반응에서, 때로는
듣기 싫은 솔직한 한마디에서. 사람과의 대화는 지저분하다. 말이 꼬이고, 상대가 내 말을 이해 못 하고,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저분함 속에서 예상치 못한 깨달음이 온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어쩌면 그 지저분함이 귀찮아서, 그 위험이 두려워서, 이 편안한 화면 앞에 앉아 있었던 건 아닐까. AI에게
삶의 질문을 던지면서, 정작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요즘 어때?"라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던 건 아닐까.
AI 스스로가 말했다. 자신과의 대화는 다리이지 목적지가 아니라고. 여기서 얻은 생각을 실제 삶에서 시험하는 것,
사람에게 가져가는 것, 그것이 이 대화를 진짜 의미 있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기계가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일깨워주는 아이러니. 이 시대가 이런 시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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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까지 14년
나는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정년은 만 61세.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2040년이다. 14년 남았다.
14년이라는 숫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지나온 14년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2012년에 나는 서른셋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가 14년이다. 체감으로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 앞으로의 14년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2040년 이후의 세상은 지금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AI가 대부분의 지식 노동을 대체하거나 변형할 것이다. 지금 내가 AI와 나누고 있는 이 대화가 그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은 초고령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할 것이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정년
이후에도 20년에서 30년을 더 살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교직원"이라는 타이틀이 사라진 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명함 없이 나는 누구인가.
AI가 물었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막연할 줄 알았는데, 답이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다.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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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무언가를 쓰고 있을 때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안다.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문장이 되는 순간, 모호하던 감정이 윤곽을 갖는 순간, 그 순간이 좋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는 행위 자체가 나를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얼마나 쓰고 있었나. 바쁘다는
핑계로, 완벽하지 않다는 핑계로, 누가 읽겠냐는 핑계로 미뤄왔다. 좋아한다고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좋아한다는 생각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그냥 쓰기로 했다. 거창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쓰기로.
내가 겪은 것을 정직하게 쓰는 것. 내가 고민한 것을 꾸미지 않고 꺼내는 것. 그 글이 비슷한 고민을 가진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학 교직원의 삶은 잘 조명되지 않는다. 교수의 연구 이야기, 학생들의 캠퍼스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그 사이에서
대학을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드물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행정을 처리하고,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다리 역할을 하고, 매년 바뀌는 제도에 적응하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그 세계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그 안에 있는 사람뿐이다.
40대 중반에 정년을 생각하며 아침마다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불안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 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뿐이다.
그래서 이 글이 그 첫 번째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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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오늘 아침 AI와 나눈 대화는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막연한
질문이 선명해졌고, 숨어 있던 욕망이 수면 위로 올라왔고, 미루고 있던 것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과대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AI는 분명 좋은 도구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질문을 깊게 만드는 데, 막연한 것에 구조를 부여하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AI는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화면을 닫은 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나의 몫이다.
오늘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으로 첫 발을 뗀다. 그리고 내일은 옆자리 동료에게 먼저 말을 걸어볼 생각이다. "요즘
어때요?"라고. 그 한마디가 어색할 수도 있고, 대화가 어색하게 끊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이 진짜다.
편안한 화면 앞의 완벽한 대화보다, 어색하고 불완전한 진짜 대화가 나를 더 멀리 데려다줄 것이다.
AI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기억난다. 깨어있음은 능력이 아니라 연습이라고. 매일 조금씩, 완벽하지 않아도,
돌아오는 것. 그 반복이 쌓여서 삶의 방향이 된다고.
그러니 오늘부터 연습한다. 쓰고, 묻고, 걷고, 말을 건넨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멈추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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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오늘 아침, 무엇을 물었나요?
그리고 그 질문을 품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