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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같은 원산지, 같은 품종의 원두인데 어떤 카페에서
마시면 부드럽고 향이 깊은데, 다른 곳에서 마시면 텁텁하고 쓴맛이 앞선다. 원두가 같은데 왜 맛이 다를까. 물론
추출 방식이나 물의 온도 같은 변수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만드는 과정이 있다. 바로 로스팅이다.
최근 커피 업계에서 자주 들리는 단어가 있다. 진공질소로스팅. 처음 들으면 화학 실험실에서나 나올 법한
이름이다. 대체 뭐가 다르길래 이름부터 이렇게 거창한 걸까.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렵지 않게, 커피
한 잔 앞에 앉아 읽을 수 있는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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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로스팅이 뭔지부터
커피 원두는 원래 초록색이다. 생두라고 부르는 이 상태로는 마실 수 없다. 딱딱하고, 풋내가 나고, 우리가 아는
커피의 맛과 향이 전혀 없다. 이 생두에 열을 가해서 우리가 아는 갈색 원두로 바꾸는 과정이 로스팅이다.
로스팅 중에 일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수백 가지 화학 반응이 동시에 벌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마이야르
반응과 캐러멜화다. 마이야르 반응은 아미노산과 당이 열에 의해 결합하면서 갈색을 띠고 복합적인 풍미를
만들어내는 반응이다. 고기를 구울 때 표면이 갈색으로 변하면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캐러멜화는 당이 열에 의해 분해되면서 단맛과 쓴맛, 그리고 특유의 향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두 가지 반응이 어떻게, 얼마나, 어떤 환경에서 일어나느냐에 따라 같은 생두도 전혀 다른 맛의 커피가 된다.
로스터의 실력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일반적인 로스팅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공기 중에서 볶기 때문이다. 공기에는 약 21%의 산소가 포함되어
있고, 이 산소가 고온에서 원두와 만나면 산화가 일어난다. 산화는 커피의 섬세한 향미 성분을 파괴하고,
텁텁함과 잡미를 만들어내는 주범이다. 또한 공기를 통한 열전달은 불균일할 수 있어서, 원두 표면은 과하게
볶이고 내부는 덜 볶이는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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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등장한 진공질소로스팅
이름을 분해하면 원리가 보인다. 진공 + 질소 + 로스팅.
먼저 로스팅 챔버 안의 공기를 빼낸다. 진공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산소가 사라진다. 그 다음 질소
가스를 채운다. 질소는 대기의 약 78%를 차지하는 기체로,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적이다. 다른 물질과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 즉, 원두 옆에 있어도 원두를 산화시키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 로스팅을 진행한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가 달라진다.
첫째, 산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산소가 없으니 당연하다. 로스팅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섬세한 향미 성분들이
산화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고스란히 원두 안에 남는다. 일반 로스팅에서 "날아가버리는" 향이
진공질소로스팅에서는 살아있는 이유다.
둘째, 열전달이 균일해진다. 질소 가스가 원두를 감싸며 고른 열을 전달하기 때문에, 원두 표면과 내부의 로스팅
차이가 줄어든다. 쉽게 말해, 원두 하나하나가 고르게 볶인다. 스테이크로 비유하자면, 겉은 타고 속은 날것인
상태가 아니라, 겉과 속이 균일하게 익은 상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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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맛이 정말 다른가
이론은 그럴듯한데, 실제로 혀가 느낄 수 있는 차이가 있느냐. 결론부터 말하면, 있다. 특히 같은 원두를 일반
로스팅과 진공질소로스팅으로 각각 볶아서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산미가 밝아진다. 커피의 산미는 원두에 들어있는 유기산에서 온다. 구연산, 사과산, 인산 같은 성분들이다. 이
성분들은 산화에 취약해서 일반 로스팅에서는 상당 부분 변성되거나 사라진다. 진공질소로스팅에서는 이 산미가
살아남는다. 그래서 같은 원두인데도 과일 같은 밝은 산미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바디감이 깔끔해진다. 일반 로스팅에서 생기는 산화 부산물들이 텁텁함의 원인이 된다. 이것이 줄어드니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한결 깨끗해진다. "무겁다"가 아니라 "부드럽다"에 가까워진다.
향의 복합성이 올라간다. 커피의 향을 구성하는 휘발성 화합물은 약 800종이 넘는다. 이 중 상당수가 열과 산소에
민감하다. 산소를 차단한 환경에서 로스팅하면 이 휘발성 향 성분들의 보존율이 높아진다. 코에 닿는 첫 향부터
마시고 난 후의 잔향까지, 층이 더 풍부해진다.
후미가 깔끔해진다. 커피를 삼킨 후 입안에 남는 맛을 후미라고 한다. 일반 로스팅에서는 탄 맛이나 쓴맛이 후미로
남는 경우가 있다. 진공질소로스팅에서는 이 후미가 깔끔하게 사라지거나, 은은한 단맛으로 마무리되는 경향이
있다.
블랙으로 마실수록 이 차이는 선명해진다. 우유나 설탕을 넣으면 원두 자체의 미세한 차이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만약 진공질소로스팅 원두를 처음 시도한다면, 블랙으로 한 잔 마셔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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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누구에게 좋은가
모든 사람에게 맞는 커피가 없듯이, 진공질소로스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특히 잘 맞는 사람들이 있다.
밝은 산미를 좋아하는 사람.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나 케냐 원두의 과일 같은 산미를 좋아한다면, 진공질소로스팅이
그 산미를 더 선명하게 살려줄 것이다.
블랙 커피를 즐기는 사람. 아무것도 넣지 않고 원두 본연의 맛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면, 산화되지 않은 깨끗한
풍미를 경험할 수 있다.
위장이 예민한 사람. 일반 로스팅에서 생기는 산화 부산물이 위장에 자극을 줄 수 있다. 진공질소로스팅은 이런
자극 물질이 적어 속이 편하다는 후기가 많다. 물론 개인차가 있으므로 과신은 금물이다.
원두의 산지별 차이를 비교하며 마시는 사람. 스페셜티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산지 고유의 특성이 더 잘
보존되는 진공질소로스팅에서 각 원두의 개성을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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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좋은 것들 — 과대광고와 현실 사이
여기서 한 발 물러서서 냉정하게 봐야 할 것들이 있다.
진공질소로스팅이 만능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로스팅 방식이라도 원두 자체의 품질이 떨어지면 한계가 있다. 저급
원두를 진공질소로 볶는다고 고급 커피가 되지는 않는다. 좋은 재료에 좋은 조리법이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가격이 높다. 진공질소로스팅은 설비 비용이 크고, 공정이 복잡하다. 그만큼 원두 가격에 반영된다. 일반 로스팅
원두보다 비싼 경우가 많다. 그 차이가 자신의 미각에서 값어치를 하는지는 직접 마셔보고 판단할 일이다.
로스팅 방식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 원두의 품질, 로스팅 후 신선도, 보관 방법, 추출 방식과 물의 온도. 이런
기본적인 요소들이 갖춰지지 않으면 로스팅 방식의 차이는 묻힌다. 진공질소로스팅 원두를 사놓고 한 달간 밀봉도
안 하고 방치하면, 일반 로스팅 원두를 갓 볶아서 바로 내린 것만 못할 수 있다.
마케팅 용어에 현혹되지 말자. "진공질소로스팅"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무조건 좋은 커피는 아니다. 실제로
어떤 수준의 진공을 만들고, 질소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업체마다 다르다. 이름만 빌려 쓰는 경우도 있다. 신뢰할
수 있는 로스터인지, 원두의 산지와 등급은 어떤지를 함께 확인하는 것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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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의 과학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마시는 커피 한 잔 안에는 놀라운 양의 과학이 들어있다. 생두가 자라는 토양의
미네랄 구성, 수확 후 가공 방식, 로스팅 중의 화학 반응, 추출 시 물과 원두가 만나는 시간과 온도. 이 모든
변수가 조합되어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한 잔이 된다.
진공질소로스팅은 그 변수 중 하나를 정밀하게 통제하려는 시도다. 산소라는 불청객을 제거하고, 질소라는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 원두가 가진 본래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려는 노력이다.
알고 마시면 같은 커피도 다르게 느껴진다. 내일 아침 커피를 내리기 전에, 잠깐 원두 봉지 뒷면을 들여다보시라.
로스팅 방식이 적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시며 생각해보시라. 이 맛과 향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다음에 카페에서 "질소로스팅"이라는 문구를 보게 되면, 이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것이다. 그리고
아는 만큼, 커피가 더 맛있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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